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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사업

  • '귀족'으로 태어나 '농민'으로 떠나간 '피자 신부님'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임실치즈의 아버지', '피자 신부님'으로 불렸던 지정환 신부(디디에 세스테벤스). 그는 살아생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장례식 때 가수 노사연의 노래인 '만남'을 틀어달라고 했다. "우리의 모든 만남은 하나라도 우연이 없다. 그렇게 귀하게 만났으니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선곡 이유를 밝혔다.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전파하는 데에 평생을 바친 지 신부는 지난 13일 하늘로 갔다.

    매해 전북 임실군 '임실치즈테마파크'를 찾는 관광객이 연간 20만명, 임실군의 연 수익은 270억원에 현재까지 추산되는 지역경제 파급효과는 1000억원 정도에 달한다. 전국적으로 임실치즈피자 프랜차이즈 업체는 20여개이며 임실치즈를 쓰는 브랜드가 70여개다.

    아는 사람만 알았던 전북의 조그만 지역이 '치즈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도록 혁혁한 공을 이뤄낸 지 신부이지만 사실 그는 어릴 적부터 치즈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가 임실군에 치즈 공장을 세우고 치즈 생산 개발에 몰두했던 건 순전히 가난에 찌들었던 농민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서였다.

    ◆농민 삶 일구려 간척사업... 담낭 제거까지 했건만 '헛수고'로

    지 신부는 1931년 2월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한 귀족 집안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58년 가톨릭 사제가 된 그는 전쟁으로 한국이 아프리카보다 가난하다는 이야기에 한국행을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듬해 12월, 아직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던 부산항을 통해 한국에 발을 디뎠다.

    1960년 3월 천주교 전주교구에 배속돼 전북 전주시 전동성당의 보좌신부로 온 그의 이름은 김이환 신부가 지어주었다. 본명 '디디에'와 발음이 비슷한 '지'를 성으로, 김 신부 이름의 끝 자 '환'을 따라 '정의가 환하게 빛난다'는 '정환'으로 이름을 받아 훗날 임실 지씨의 시조가 된다.

    지 신부는 1961년 7월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되어 부안군으로 떠났다. 어렵게 사는 농민들의 생활상에 충격을 받은 그는 경제적인 도움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당시 부안은 정부 주도로 간척사업을 하고 있었다. 지 신부는 3년 만에 30만평(100ha)에 이르는 땅을 농민들이 간척하게 하고, 간척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그 땅을 나눠주었다. 그 덕에 100가구가 약 3000평씩 땅을 갖게 됐다. 이 과정에서 무리를 했던 터라 지 신부는 담낭 제거 수술까지 받았다. 워낙 긍정적인 성격이었던 지 신부는 이 일로 "나는 쓸개 없는 사람이여"라는 농담도 자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양차 벨기에에 갔다가 6개월 후 돌아와 보니 힘들게 간척한 땅들이 고리대와 노름으로 부자들에게 모두 넘어갔다. 간척사업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것. 지 신부는 '다시는 한국인들의 (경제적인)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전해진다.


  • 지정환 신부(왼쪽)가 1978년 7월 임실 치즈공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치즈를 만들고 있다. 임실군 제공


  • ◆이탈리아까지 가서 치즈 공부... '임실 치즈'로 우뚝

    하지만 1964년 척박한 임실군에서 농민들이 가난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당시 문필병 임실군수는 지 신부에게 "신부님, 이곳을 떠날 땐 가난한 임실을 위해서 뭔가를 남겨달라"고 했다고 알려졌다.

    지 신부는 풀밭이 많은 임실에서 키울 생각으로 다른 신부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산양 2마리를 이곳에 들여왔다. 하지만 한국 사람에게 낯설었던 산양유가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자 남은 산양유로 치즈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벨기에의 부모님으로부터 2000달러를 받아 허름한 치즈 공장을 세웠다. 부모님은 '치즈도 좋아하지 않는 아들이 한국인과 치즈 공장을 세운다'고 하니 의아해했다고 한다. 치즈 제작에는 수많은 실패가 따랐다. 지 신부는 두부 제조용 간수도 넣고 약탕기도 사용해보고 간장이며 누룩까지 다 넣어봤다고 했다.

    3년이 지나도 치즈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에 지 신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까지 견학을 가서 3개월동안 기술을 배워왔다. 치즈 제조법은 산업 기밀이었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한 치즈 기술자가 노트에 기술을 적어 신부에게 주었다고 했다. 그렇게 1969년에야 균일한 치즈 제작에 성공했다.

    한국 사람에게 낯설었던 치즈가 처음부터 수요가 많았던 건 아니다. 신부는 직접 판로를 개척하려고 외국인이 많이 머무는 호텔, 남대문의 외국인 전용 상점, 한국 최초의 서울 명동 피자가게도 찾아가 판로를 개척했다. 그렇게 임실 치즈는 서울 특급 호텔에 납품될 정도로 유통망을 넓혔다. 나중에는 수요가 많아져 산양유에서 우유로 원료를 바꿨고, 임실치즈는 임실치즈테마파크와 함께 임실군의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몸 신경 마비돼 휠체어 신세, 재단 설립해 장애인 복지에 큰 힘

    지 신부는 대한민국의 민주화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에 항거해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저항 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국외 추방위기까지 겪었다. 다만 치즈 산업 육성을 통한 농촌 경제 육성의 공을 인정받아 경찰에 감시만 받는 정도로 마무리됐다.

    오른쪽 다리에는 다발성신경경화증까지 찾아왔다. 몸의 신경이 조금씩 마비돼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 1981년 지 신부는 치즈 공장의 운영권, 소유권을 모두 주민협동조합에 넘기고 치료를 위해 벨기에로 갔다.

    3년간 벨기에에서 치료를 받고 1984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인 '무지개가족'을 전주 인후동에 설립했다. 2004년 사재직을 후임 신부에게 물려줬다. 지 신부의 도움을 받아 '무지개가족'을 통해 재활에 성공하거나 자립한 중증장애인은 100명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 신부가 장례식장에서 영정으로 써달라고 한 십자수 초상도 '무지개가족'의 일원이 자립교육으로 동양화 자수를 배우고 나서 선물해준 것이다.

    지 신부는 이후 2002년 치즈산업 육성과 장애인 복지에 기여한 공로로 호암상을 받았고 상금 1억원을 쾌척해 2007년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해 운영했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 "한국인, 지 신부 존경해"... 별세 후 국민훈장 수여돼

    2016년엔 정부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한국 국적을 받았다. 3월26일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마틸드 벨기에 왕비와 가진 청와대 환담 때 "한국인들도 임실치즈를 즐기며 지정환 신부를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평생 '나눔의 삶'을 이어온 지 신부의 공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임실치즈농협', '지정환 치즈피자'의 체인점들은 매달 무지개 장학재단에 브랜드 사용료로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으며 '무지개가족', '세영재단' 등도 힘을 보태고 있다.

    '공수신퇴(功遂身退)', '공을 이루었다면 이내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고인이 생전 좋아했던 말이다. 그의 삶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한 사자성어가 또 있을까. 정부는 치즈 산업 발전의 공적을 인정해 국민훈장 2번째 등급인 모란장을 수여했다. 천주교 전주교구는 16일 오전 10시 전주 중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진행한다. 장지는 전주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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